영상 보기몽골 제국을 가로지른 모든 전언은 중간에 서 있는 누군가를 거쳤습니다. 한 언어를 듣고 다른 언어로 말하거나, 한 문자를 읽고 또 다른 문자로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들의 이름을 좀처럼 적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영상은 1250년경부터 1300년경 사이의 몇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쿠빌라이의 궁정에 간 고려 사람
영상은 1237년 상원에서 태어난 조인규에게서 시작합니다. 상원은 고려군과 몽골군이 맞서던 경계선 가까이에 있던 고을입니다. 한국 쪽 기록에는 조정이 젊은이들을 뽑아 몽골어를 배우게 했고, 조인규가 그중 한 사람으로 밤낮없이 공부했다고 나옵니다. 1269년에 그는 훗날의 충렬왕인 세자를 따라 쿠빌라이의 궁정으로 가서 통역을 맡았습니다. 그날을 묘사한 기록은 없어서, 영상의 첫 장면은 이 방문이라는 최소한의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해 그린 것입니다.
이 기술은 그를 멀리 데려갔습니다. 그는 세자가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하도록 주선하는 일을 도왔고, 여러 관직을 거쳐 1290년대에는 재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1298년에 새 왕의 몽골인 아내가 왕의 다른 아내, 곧 조인규의 딸이 자신을 저주했다고 고발하고 그 일을 원나라 조정에 알렸습니다. 일가는 체포되었고 조인규는 서쪽 먼 곳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약 6년 뒤에 돌아왔습니다.
하나의 편지, 네 가지 언어
이 일의 모습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주는 이는 수도사 플라노 카르피니의 요한입니다. 그는 1245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명으로 동쪽에 파견되었고, 폴란드 사람 베네딕트가 통역을 맡았습니다. 카르피니의 말로는 첫 번째 몽골 진영에서는 아무도 교황의 서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246년 4월 바투의 진영에서는 서한이 러시아어, 사라센어, 몽골어로 옮겨졌고, 바투는 몽골어 문서를 읽었습니다. (“사라센”은 아랍 문자를 뜻했는데, 그것이 어떤 언어를 적은 것인지는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 구육의 진영에서는 수도사들이 용건을 글로 적은 다음 통역관들을 통해 소리 내어 다시 말했고, 통역관 가운데 한 사람은 테메르라는 기사였습니다.
1246년 11월의 칸의 답신은 참으로 정성스럽게 다루어졌습니다. 칸의 서기들이 수도사들에게 한 마디 한 마디 읽어 주었고, 수도사들이 그것을 라틴어로 옮겼으며, 서기들은 다시 그들에게 구절마다 설명하게 하여 두 판본을 견주어 보았습니다. 사라센 문자로 된 사본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수도사들은 고향에서 그것을 읽을 사람이 없다고 답하고 몽골어 원본을 자신들의 라틴어 번역과 함께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40년 뒤에는 오가는 방향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일 칸 아르군이 교황에게 보낸 1285년 5월자 라틴어 서한이 교황청 등록부에 남아 있는데, 학자 장바티스트 샤보는 번역자들이 라틴어보다 몽골어를 훨씬 잘 알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서한에는 이세와 우게토라는 두 통역관의 이름이 나옵니다. 1289년에 아르군은 프랑스의 필리프 4세에게 몽골어로 편지를 썼고, 한자로 새긴 붉은 도장을 찍었습니다. 부스카렐로라는 제노바 사람이 프랑스어 비망록과 함께 이 편지를 전했습니다.
관청, 학교, 그리고 실수
몽골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썼습니다. 모리스 로사비는 칭기즈 칸이 사로잡은 위구르 사람과 거란 사람을 서기로 부렸고, 몽골 지배 아래에서 말하는 일과 글 쓰는 일이 서로 다른 직함을 가진 별개의 직분이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1272년에 원나라는 통역관 양성 기관을 세웠다가 1288년에 닫았고(아마 무슬림 통역관들을 의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292년에 다시 열었습니다. 고려는 1276년에 자체 학교인 통문관을 세웠는데, 한 관리가 통역관들이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때로는 이익을 위해 말을 비틀기도 한다고 호소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한국의 한 백과사전은 조인규 같은 사람들이 실제 일을 대부분 해냈으므로 이 학교가 크게 바꾼 것은 없었을 것으로 의심합니다.
실수도 이 이야기의 일부였습니다. 1253년에 여행한 루브룩의 윌리엄에게는 그가 호모 데이(Homo Dei)라고 부르는 통역관이 있었는데, 루브룩은 몽골어를 조금 익히고 나서 이 사람이 종종 전혀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잠자코 있기로 했습니다. 루브룩은 또 루이 9세의 서한을 옮긴 아르메니아 번역자들이 루이가 하지도 않은 파병 요청을 슬쩍 끼워 넣었다고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근래의 한 학술지가 여행 패찰에 새겨진 페르시아 문자 명문 하나를 전문가 다섯 명에게 읽게 하자, 다섯 가지 해석이 나왔습니다.
붙잡힌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사라진 사람
일부는 붙잡혀 이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학자 키라코스는 1236년에 사로잡혀 편지를 읽고 쓰는 일에 쓰였는데, 포로로 잡은 이들이 몸값을 받고 풀어 주려 하지 않자 그날 밤 달아났고, 훗날 몽골어 단어 약 쉰 개를 적어 두었습니다. 『원사』가 서쪽 먼 곳 사람이라 부르는 이사는 구육을 섬기고 이어서 쿠빌라이를 섬겼으며, 아르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그가 1285년 서한에 나오는 이세라고 보지만, 이는 이름이 닮았다는 데 근거한 것입니다. 1287년 랍반 사우마의 서쪽 여행에는 이탈리아 통역관 두 사람이 함께했는데, 서한에 나오는 토마스와 우게토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것이 여전히 희미합니다. 저는 이 시기 통역관들의 급료 명부를 찾지 못했고, 조각난 단서만 만났습니다. 라틴어, 페르시아어, 쿠만어 단어집인 『쿠마니쿠스 사본』에는 1303년이라는 연도가 적혀 있지만 후대의 필사본입니다. 제국을 하나로 묶은 것이 페르시아어였는지, 튀르크어였는지, 아니면 어느 하나의 언어도 아니었는지를 두고 학자들은 아직도 논쟁합니다. 로사비는 그런 언어가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그렇다면 이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영상은 이 목소리 가운데 몇몇에 얼굴을 입혀 보여 줍니다. 아래의 자료를 따라가면 하나하나를 원문의 쪽까지 거슬러 올라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Cho In’gyu” (1237년 상원에서 출생, 1269년의 통역관 활동, 왕실 혼인, 1298년의 체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인규” (몽골어를 배울 인재로 선발, 유배 후 약 6년 만에 귀환)
- 위키백과, “Chungnyeol of Goryeo”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한 세자)
- John of Plano Carpini, Ystoria Mongalorum, 워싱턴 대학교 실크로드 사이트의 발췌문 (교황의 서한과 칸의 답신, 1245년부터 1246년)
- J.-B. Chabot, Histoire du patriarche Mar Jabalaha III et du moine Rabban Çauma (1895), 부록 I (1285년 아르군의 라틴어 서한, 이세와 우게토)
- Encyclopaedia Iranica, “Arghun Khan” (1289년의 사절단과 제노바 사람 부스카렐로)
- 위키백과, “Buscarello de Ghizolfi” (1289년의 몽골어 서한, 프랑스어 비망록, 1305년의 번역)
- Morris Rossabi, “Communications and ‘Communicators’ in the Yuan and Early Ming,” Journal of Chinese History (2025) (칭기즈 칸 아래의 서기들, 통역관 양성 기관, 쉬팅, 공용어 문제)
- Stephen G. Haw, “The Persian Language in Yuan-Dynasty China: A Reappraisal,” East Asian History 39 (2014) (국자감, 여행 패찰에 새긴 글의 다섯 가지 해석,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 Ji-won Kim, “The Korean Tradition of Translation,” Journal of Language & Translation 9 (2008) (1276년의 통문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통문관” (김구의 건의, 학교를 세운 이유, 의심스러운 효과)
- 위키백과, “Bureau of Interpreters” (1276년 충렬왕이 설립)
- William of Rubruck, Itinerarium, W. W. Rockhill 영역 (Hakluyt Society, 1900) (호모 데이, 부셰의 집안, 사르탁에게 보낸 편지)
- 중국어판 위키백과, “黑鞑事略” (1235년부터 1236년 쉬팅의 사행)
- Kirakos Gandzakets’i, History of the Armenians, Robert Bedrosian 영역, 24장과 32장 (1236년의 피랍, 몽골어 단어 목록)
- 위키백과, “Kirakos Gandzaketsi” (바나칸과 함께 붙잡힌 일)
- 『원사』 134권, 애설(愛薛, 이사) 열전, 위키문헌 (불림, 언어와 별자리와 의술, 아르군에게 간 사행)
- 위키백과, “Isa Kelemechi” (켈레메치라는 칭호)
- 위키백과, “Rabban Bar Sauma” (1287년의 토마소 다안포시와 우게토)
- Encyclopaedia Iranica, “Codex Cumanicus” (라틴어, 페르시아어, 쿠만어, 후대 필사본에 적힌 1303년이라는 연도)
이 편지는 영상의 조사된 대본과 출처 노트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정정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