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보기밤마다 부산에서 페리 한 척이 떠나 대한해협을 약 200킬로미터 건너고, 새벽에 하카타만으로 들어옵니다. 지금은 양쪽 기슭이 모두 큰 항구입니다. 하지만 1270년에는 전혀 달랐고, 이번 주 영상은 전쟁이 어떻게 두 곳을 하나로 묶었는지를 다룹니다.
대륙으로 열린 문
지금은 후쿠오카의 일부인 하카타는 수백 년 동안 일본의 현관이었습니다. 600년대부터 당나라와 한반도의 신라에서 온 사신들이 이곳 해안의 객관에 묵은 뒤 수도로 향했습니다. 1047년에 객관이 불타자 민간 상인들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1100년경에는 중국 상인들이 하카타에 자기들만의 구역인 도보(唐坊)를 이루었고, 수백 가구가 살았습니다.
이 도시가 얼마나 다채로웠는지는 두 가지 이야기로 알 수 있습니다. 1195년에 승려 에이사이는 중국인 거주민들이 세운 불당 터에 쇼후쿠지를 세웠는데, 이 절은 흔히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선종 사찰로 불립니다. 또 1230년대에는 일본인 아내와 함께 하카타에 정착한 항저우 상인 사국명(謝國明, Xie Guoming)이 승려 엔니를 받아들이고, 또 다른 절인 조텐지를 위한 땅을 사도록 도왔습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불타 버린 항저우의 수도원을 다시 짓도록 통나무 약 1000개를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오늘날 도시의 땅속에는 그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수출용 유황, 그리고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에서 온 도자기가 무더기로 나옵니다. 2017년에는 그 가운데 2000점이 넘는 유물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1270년의 하카타를 묘사한 여행자는 없고 인구 수치도 전해지지 않지만, 분주한 국제 항구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조용한 고을
해협 건너편의 부산 일대는 항구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동래라는 고을로, 언덕과 논과 어촌 포구가 있는 땅이었으며, 1270년에 그곳에 항구가 있었다고 적은 자료를 저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 둘레의 나라 고려는 30년 가까이 몽골과 싸운 끝에 1259년 몽골이 내건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습니다. 1270년에 조정은 육지로 돌아갔습니다. 일부 병사들은 따르지 않고 1273년까지 남쪽 섬들에서 버텼습니다. 한편 쿠빌라이 칸은 1266년부터 1273년 사이에 일본으로 사절을 여섯 차례 보내 복속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번번이 사절을 돌려보냈고, 쿠빌라이는 배를 얻으려고 고려로 눈을 돌렸습니다.
한국 쪽 기록에는 배가 약 900척, 그중 큰 배가 약 300척이었고, 수만 명의 일꾼이 몇 달 만에 지었다고 나옵니다. 몽골은 그 값을 종이 화폐로 치렀다고 전해집니다. 함대는 오늘날의 마산인 합포에 모였는데, 부산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1274년과 1281년
1274년 가을에 함대는 쓰시마와 이키를 치고, 11월에 하카타에 상륙했습니다. 수적으로 밀린 규슈의 무사들은 물러났고, 이름 높은 하코자키 신궁이 불탔습니다. 그러고 나서 침략군은 배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폭풍이 그들을 덮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의심하며, 지휘관들이 이만하면 충분한 습격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라고 봅니다. 한국 기록에는 출정한 병사 가운데 1만 3000명이 넘게 돌아오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막부는 두 번째 시도를 예상했습니다. 1276년부터 규슈의 모든 영주는 자기 논의 크기에 비례해 하카타만을 둘러싼 돌 방벽의 한 구간씩을 쌓았습니다. 길이는 약 20킬로미터, 높이는 2~3미터였고, 바다 쪽 면은 깎아지른 듯 가팔랐습니다.
쿠빌라이는 1281년에 두 갈래 함대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하나는 한반도에서, 다른 하나는 훨씬 큰 규모로 중국 남부에서 출발했습니다. 기록에는 병력이 약 14만 명이라고 나오지만, 역사가들은 지나치게 부풀려진 수치라고 봅니다. 이번에는 방벽이 버텼습니다. 침략군은 하카타에 상륙하지 못했고, 일본의 습격대는 밤마다 노를 저어 나가 정박한 배들을 공격했습니다. 8월 중순에는 태풍이 다카시마 앞바다에서 남쪽 함대를 부수었고, 그곳에서 잠수부들이 돌 닻과 목재, 그리고 몽골 지휘관의 것이었을지도 모르는 도장을 찾아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 태풍을 신의 바람이라는 뜻의 가미카제라고 불렀습니다. 승리 가운데 얼마가 날씨의 몫이고, 얼마가 방벽과 그것을 쌓은 사람들의 몫인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그 뒤에 온 것
방벽은 남았고, 교역도 이어졌습니다. 1293년에 두 차례의 침략에 모두 참전했던 무사 다케자키 스에나가는 포상을 요구하기 위해 자신의 공적을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리게 했습니다. 1323년경에는 닝보를 떠나 하카타로 향하던 무역선이 도자기 2만 점이 넘게, 그리고 중국 동전 28톤을 싣고 한국 앞바다에서 가라앉았습니다.
부산의 부상은 그보다 나중의 일입니다. 1400년대 초에 조선은 일본 상인들이 항구 옆 거류지에 살도록 허용했고, 1876년에 부산은 한국 최초의 국제 항구가 되었습니다. 하카타의 방벽은 해변 공원의 풀로 덮인 조각들만 남아 있고, 부산에서 오는 아침 페리는 지금도 그 곁을 지나 들어옵니다.
시간이 10분뿐이라면 영상을 보세요. 이 글의 내용을 확인해 보고 싶다면, 제가 쓴 모든 자료를 아래에 적어 두었습니다.
출처
- 위키백과, “Mongol invasions of Japan” (함대 규모, 사절, 『고려사』에 기록된 한국의 손실)
- 위키백과, “Battle of Bun’ei” (1274년의 상륙과 폭풍 논쟁)
- 위키백과, “Battle of Kōan” (1281년, 정박한 함대에 대한 야간 기습)
- 위키백과, “Genkō Bōrui” (하카타만의 방벽: 1276년 착공, 길이 약 20km)
- 위키백과, “Goryeo under Mongol rule” (1259년의 강화, 종이 화폐로 치른 선박 값)
- 위키백과, “Sambyeolcho Rebellion” (1270년부터 1273년)
- 위키백과, “Hakata Site” (유황, 수입 도자기, 2017년 지정)
- 위키백과, “Shōfuku-ji (Fukuoka)” (에이사이, 1195년)
- 위키백과, “Jōten-ji” (엔니와 항저우 상인 사국명)
- 위키백과, “Hakozaki Shrine” (1274년에 불탐)
- 위키백과, “Mōko Shūrai Ekotoba” (다케자키 스에나가의 두루마리 그림, 1293년)
- 위키백과, “Shinan ship” (1323년경, 닝보에서 하카타로)
- 위키백과, “History of Busan” (동래현, 왜관, 1876년)
- 위키백과, “Hakata Gion Yamakasa” (1241년의 전승)
- nippon.com, “The Battle of Bun’ei” 및 “Ships on the Seabed” (1274년의 철수, 다카시마 유물 발견)
- World History Encyclopedia, 하카타만 방벽과 스에나가의 두루마리 그림에 관한 글
- Zenodo, “Buddhist Traders in the Chinese Quarter in Hakata” (도보, 1100년경부터 1300년까지)
- 한국경제와 아시아경제(한국 언론), 1274년 고려의 선박 건조에 관한 기사
- 부산광역시, 컨테이너 물동량 통계, 2024년
- Fukuoka Now, 후쿠오카와 하카타라는 이름에 관한 글(1600년, 1889년)
이 편지는 영상의 조사된 대본과 출처 노트를 바탕으로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정정 보내기